이혼 SUPER TALK

1.
로펌을 그만두고 회사에 온 건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급여에 대해 불만족, 서면 작성이나 동료, 상사에 의한 스트레스, 복지 수준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 오롯이 내 문제였다. 감정이입 때문이었다. 서면을 쓰다 보면 의뢰인이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억울한 점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에서 시작해, 어느 새 감정적으로 의뢰인에게 몰입돼 있다. 덕분에 서면은 잘 썼다. 기가 막히게 쓴다, 10년차보다 잘 쓴다 별별 칭찬을 다 들었다. 그놈의 감성. 서면을 의뢰인 마음에 꼭 들게 쓰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문제는 패소라도 하면 너무 타격이 컸다는 것이다. 내 일 같았다. 주변에서는 충고를 해줬다. 생각보다 많은 신입 변호사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의뢰인을 대리해서 싸워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의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심신이 버티질 못한다… 다들 그랬다. 그게 어려웠다. 무심하기란 힘들었다. 일을 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렇게 무심해져야 진짜 변호사가 되는 것이라면 굳이 변호사가 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싶었다.

2. 
형사 위주 펌이었기에 그렇게 많이 기회는 없었지만, 가사사건에 대한 서면도 쓸 기회가 있었다. 제일 괴로웠던 게 가사사건 서면이었던 것 같다. 상대의 귀책사유를 하나 둘 꺼내다 보면 어느 새 상대방을 성격파탄자나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린다. 다들 그땐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일까. 서면을 쓰다 멍하게 상념에 잠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이혼을 경험한 주변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만나볼까도 싶었지만 그거야말로 민폐다. 그런 소리 꺼내지 않길 잘하였다.

3.
너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30대에는 책을 쓰자고 생각했는데 벌써 30살을 훌쩍 넘어버렸네. 그러고보면 이글루를 쓰는 사람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옛날에는 마이리더만 보아도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건만, 지금은 다들 문을 닫아 띄엄띄엄이다. 실제 유저수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고.

6년만 SUPER TALK

1.
여기 글을 쓴 지 6년이 지났다. 서비스 하나가 망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라는 점에서, 이글루스가 아직 망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점은 놀랍다. 블로그라는 매체엔 영속성 따윈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 그랬다. 내 아이디가 삭제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지만. 아직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남아있기에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더랬다. 다들 잘 살고 있구나.

나도 잘 살고 있다. 직업은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직장인에서 '반쯤 직장인'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더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영업자의 표상이다. 매일 7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퇴근하면 아직 해가 지지 아니한다. 놀러가고 싶지만 지금은 너무 춥고 놀러갈 만한 상황도 아니다. 어쩌면, 눈이 녹고 꽃이 피어 이슬이 땅에 떨어지는 즈음이면 가능할 듯도 싶다. 고궁에나 가서 걷고 싶구나.

30 SUPER TALK

1.
가까운 사람 외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적용해왔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면 호의로 돌아온다. 악의는 복수로 돌아온다. 상대방이 잘못을 하기 전까지는 항상 호의를 베푸는 게 원칙이다. 뒤통수를 때리면 상대가 손을 내밀 때까지 계속해서 보복한다. 손을 내밀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호의적인 관계로 돌아간다. 최근 깨닫게 된, 간단하지만 가장 잘 먹히는 원칙이다. 어제 친구가 그랬다. 요즘 넌 딱 부러져서 알기 쉽다, 고.

2.
최근에 내가 알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세게, 아주 세게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당한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 금전이나 신체적인 피해 말이다. 단지 모르는 사이 뒷담화를 당했다는 점에 울화가 났을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 말을 듣고보니, 그분이 나를 대하던 행동의 속뜻이 이러이러한 것이었구나를 저절로 짜맞춰 보게 됐다.

화가 났다. 놀라운 건 감정이 곧 사라졌다는 점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크로스체크를 할 시간도 열의도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내게 어떠한 의미조차 되지 못함을 뜻한다. 상대방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하거나 따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뭣보다 지나간 인간관계에 휘말려 피곤해지는 일은 이제 질색이다. 지난 일인데 무엇 할까. 그저 내 업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3.
올해로 한국 나이 서른이 되었다. 한 달 남짓이면 서른 하나다(만으로는 스물 아홉이니까 괜찮다). 물론 숫자가 바뀌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 20살 성인식 날 뭐가 바뀌었나 생각해보면 별일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신 내 주변이 바뀌었다.

최근 안 사실이라면, 시야에서 벗어난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다는 점이었다. 내 가족들도, 내 몸(키가 컸다;;)도 마음도 바뀌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많은 친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누군가의 남편과 부인이 됐다. 그새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다. 항상 가던 바도, 술집도, 음식점도 다시 가보면 없어진 곳이 태반이다. 집에 오면 여전히 반쯤 차 있을 것 같았던 디올 파렌하잇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주변을 휘둘러보면 기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과거를 그릴 나이는 아니건만, 적어도 이해받고 싶은 나이가 된 모양이다.

결혼을 해야겠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SUPER TALK

1.
노인은 광장에서 30즈워티에 사는 빵가루를 정확히 13초 간격으로 뿌려주었다.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많았다. 갑자기 공급의 간격이 늘어났다. 노인의 손은 미동도 않았다. 참다못한 어느 비둘기는 노인의 무릎까지 오르내리며 난장을 부렸다. 실갱이가 일었다. 일단의 무리는 저만치 날아갔다. 삼사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손에서 모이가 뿌려졌다. 그 앞에서 알짱거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린 놈들만 줏어먹었다. 진화한 부류다. 이젠 수요와 공급이 맞았다. 노인이 미소지었다. 백발이 햇살에 빛났다. 폴란드 브로츠와프.11.09.11.

2.
회사의 메일함은 절절 끓는 악마의 고로(高爐)다. 거기서 벌거벗고 헤엄치다 뭘 건지느냐는 사람의 역량에 달렸다. 오늘도 내 메일함은 오늘도 생활과 억울함에 찌든 사연들로 가득 찼다.

늙은 노모에게 후순위채를 적금인 것처럼 속여서 판 저축은행이 돌연 퇴출됐다. 후순위채란 다른 빚을 모두 갚은 뒤에야 받을 수 있는 채권이다. 그 은행은 지금 진 빚조차 갚을 돈이 없다. 그녀가 십여년간 고물상을 하면서 근근이 모아온 돈은 사실상 땡전 한 푼 못 찾는 '가라' 차용증이 됐다. 믿었던 10년지기 군대 동기가 전 재산을 빼돌려 해외로 도망쳤다. 잡을 방법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보니 몇 명을 거쳐온 꽃뱀이었다. 마지막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메일 같다.

운이 나쁘면 며칠에 한 번씩, 타인을 짓눌러 죽일 듯한 악의와 절망을 간접 경험한다. 그건 임사체험이나 마찬가지다. 내성이 있더라도 괴롭운 건 한가지다. 제일 괴로운 것이, 참으로 억울한 것은 알겠는데 ‘얘기가 안 될 때’다. 도저히 글로 풀어낼 수 없는 사연이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사연, 흔한 사연, 더 적확하게는 한참 전에 이미 다른 지상(紙上)에 나와버린 사연들. 물론 당자자에게 천지가 뒤집힐 사건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내겐 가치가 없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럴 때 답메일을 보내는 건 죄가 된다.
한참 망설이다 메일을 보낸 적이 몇 번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답장이 온 건 딱 한 번이었다.
“고맙습니다”

기실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항상 이메일을 주고받는 주변에서라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답메일이고 겉치레다. 그럼에도 평생 볼 일이 없을 사람에게서 날아온 말이었기에, 그 한마디는 더 반가웠다. 이렇게 한 줌의 살아갈 동력을 얻는 것이 삶이다. 약간의 온기를 메일에서 얻은 것처럼, 상대방도 그러길 바랬다.

평생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선배들이 피우는 저걸로 조금이나마 스트레스가 줄어들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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